일상 경주/이야기로 둘러보는 경주

경주 집경전구기, 집경전터

달빛 사냥꾼 2021. 9. 27. 23:33
반응형
SMALL

집경전 구기 비석

집경전은 조선의 창업자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있던 곳이다.

구기라 함은 '옛터'란 뜻이다. 즉, 지금은 없다란 뜻이다.

최초 조선을 건국하고 태조의 어진은 4곳에 봉안되었다.

관향인 전주에 경기전, 고향인 영흥에 선원전, 그리고 옛 서울인 경주의 집경전과 개성의 목흥전에 각각 어진을 봉안하였다.

 

 

태조는 1398년 판삼사 설장수를 시켜 자신의 영정을 계림부에 봉안하게 하니 이를 어용전이라 불렀다.

그 후 세종 24년(1442년)에 전주 경기전, 평양 영숭전과 같이 경주 어용전에 집경전이란 전호를 내리고, 전지기 2명을 두었다. 경기전은 집경전의 규모를 본떠 세웠다.

 

집경전은 조선 전기 경주의 초고 성역이었다. 부윤이 부임하면 이곳부터 배향하였고, 관찰사가 순찰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1469(예종1)년에 제향을 받들 때 시계가 없어서 때를 놓친 일이 있다고 중앙에 알리자, 공조에서 물시계와 해시계를 만들어 보냈다. 1494년 화재가 났을 때 나라에서 관리를 보내 집경전에 위안제를 지냈다. 1552년(명종7) 12월 객사에서 다시 큰 불이 나서 대청과 서루 등 모두 불타 버렸다. 이 화재로 인해 선령이 놀랬다 하여 도승지 권철을 보내 위안제를 올렸다.

 

임진왜란때 석조물만 남겨두고 거의 불탔다.

정조때 식년시 문과에 장원 급제한 질암 최벽은 왕에게 집경전 중건을 건의했다. 1798년(정조22)에 전각을 지어 태조 어진을 봉안하지 않고, ‘집경전구기’라는 다섯글자를 써서 내려보내며 그 자리에 비를 세우게 했다. 이때 경주 부윤 류강이 어명에 의해 비를 세우고 비문을 탁본한 것을 올리자, 정조는 그의 공을 치하하며 상을 내렸다.

전경전구기는 집경전의 옛터란 뜻이다. 세로로 쓰인 글씨 옆에 작은 글씨로 어필이라는 두글자가 보이는데 임금이 쓴 글씨란 뜻이다.

뒷면에는 숭정기원후 삼무오사월일립(崇禎紀元後 三戊午四月日)이라 적혀있다.

선정비, 부윤 여필용 백성을 사랑했다고 나와있다

 

집경전터, 용도를 알 수 없는 건물이다.

궁실宮室

 

집경전 객관客館 북쪽에 있다. 태종 때 태조 강헌대왕康獻大王의 수용晬容을 모셨고, 세종 때 전우殿宇를 고쳐지었다. 임진왜란 때 수용을 강릉부江陵府로 옮겨가 모셨고, 집경전 터와 섬돌은 모두 남아 있다.

集慶殿:在客館北하다 太宗朝에 奉安我太祖康獻大王晬容하고 世宗朝에 改造殿宇하다 壬辰兵亂에 移安于江陵府나 基址階砌는 俱在하다.

동경잡기

#집경전 #집경전구기 #집경전구기비석  #집경전구기비 #집경전지 #집경전터 #경주조선시대유적 #경주역사문화기행 #정조어필 #경주읍성인근 #조선시대경주 #일상경주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