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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운곡서원 이야기(feat 은행나무 이야기)

달빛 사냥꾼 2021. 8. 18.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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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곡서원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한다. 

운곡서원은 안동 권씨 시조 태사공 권행, 죽림 권산해, 귀봉 권덕린을 제향한곳이다. 죽림 권산해는 권전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권전이 또 다른 딸이 세자빈(문종비)으로 간택되어 나중 현덕왕후가 되었고, 그의 소생이 단종이다. 따라서 권산해는 문종과 동서 사이고, 단종의 이모부가 된다.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강탈당한 이듬해 권산해는 성삼문 등과 같이 단종 복위를 꾀하려다 그만 발각되었다. 권산해는 일이 잘못됨을 알고 탄식하며, “이는 하늘의 뜻이다. 혼자 살아서 무엇하겠는가. 살아서 사직을 바로 잡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죽어서 왕을 뵙는 것이 낫겠다라며 조복으로 갈아입고 궁궐을 향해 절을 올린 뒤, 다락으로 올라가서 떨어져 자결을 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가족들은 모두 변방으로 쫓겨나 오랫동안 수모를 당했다.

이후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모의하여 조카 단종을 복위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키려다 누설되는 바람에 금성대군은 반역죄로 처형되고 순흥은 풍기군의 속현이 되고 읍호가 강등되었다.

 

 

순흥 객사 뜰에 오래된 전설의 압각수가 있었는데, 1452(단종1)에 갑자기 나무가 말라죽으니,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했다. 어느 술사가 지나가다 나무 아래서 쉬며 말하기를 압각수가 다시 살아나면 순흥 고을은 복향될 것일세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이 말의 의미를 몰랐으나, 몇 년후 금성대군의 일로 순흥은 폐향되고 말았다.

1696(숙종 22)에 이르러 이상하게도 압각수에 생기가 돌고, 썩은 뿌리에서 피각이 쌓이더니, 나무가 점차 살아나서 큰 숲을 이뤘다. 이 후 순흥은 복향되었고, 2년 뒤엔 단종의 왕호가 복원되었다. 1742(영주18)에 사육신이 신원되고 시호가 내려졌으며 또한 압각수 아래에 금성단을 창설하였다.

 

단종때 사절한 충신들은 모두 명예가회복되었는데 권산해만 누락되었다.

죽림의 12대손인 길산 권종락은 이를 후손이 못난 탓이라 여겨 정조가 거동할 때 수레 아래에 엎드려 눈물로 호소했다. 그리하여 권산해는 복직되고 증직이 내려지게 되었다.

 

, 권산해는 금성단에 배향하고, 영월 창절사에 종향하는 영광을 입었다. 권종락은 여기에 무물지 않고 왕신리 운곡에 추원사를 창립하여 태사공을 주벽으로 모시고, 권산해와 권덕린을 배향하였다. 

 

권종락은 선조 권산해가 영예롭게 복관된 일을 길이 후세에 남기고 싶었다. 정조에게 증직 교지를 받은 권종락은 귀향길에 순흥 금성단에 들렀다. 충절의 화신이자 전설로 불린 이곳의 은행나무(압각수)를 추언사 앞에서 심고 싶었다. 

그는 압각수 가지 하나를 잘라서 행낭 속에 넣었다. 경주 운곡까지 오는 길은 4백여리로 걸어서 한달이나 걸렸다. 도착해서 가지를 보니 잎은 거의 다말랐고, 생기가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나무의 생리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권종락은 선조의 충절이 세상에 드러났다면, 이 나무는 반드시 되살아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묘우 곁 용추위에 꽂아 심으니, 그해 6 16일이었다. 신기하게도 이 나뭇가지에서 차츰 생기가 돌더니 나무가 살아났다. 

이를 본 사람들은 모두 권삲의 절의와 권종락의 숭모 정성에 의해 죽은 나무가 되살아 났다고 놀라며 감탄했다. 

 

수령이 오래된 은행나무들이 많지만, 운곡서원의 은행나무는 조금 특별하다. 

현재의 우리들에게 아름다움과 힐링 공간을 마련해주고 있다. 혹여나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운곡서원 은행나무를 보면 이런 사연이 있었구나 하고 한번쯤 작은 인사라도 하자~

죽림실기의 압각수기에 자세한 내용이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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